좋은책

파친코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강렬한 서사만큼 강력한 시작이었다. 한참 이 말을 되새기느라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양진, 선자 모녀와 선자의 아들들 노아, 모자수 형제 그리고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시작해 1989년 오사카에서 끝나는 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두 권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2권 중간 부분에서 자이니치 3대에 해당하는 모자수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일본인 형사 하루키에게 하는 말이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자이니치들의 삶에 대한 요약이다. 모자수는 학교에서 동급생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린 조선인 중학생의 죽음을 두고 괴로워하는 일본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본인도 다 겪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계 1.5세인 미국 작가 이민진은 예일 대학 3학년이던 1989년 일본에 살았던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자이니치’라는 용어와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후 30여 년에 걸쳐 이 소설을 썼다.

“고생이라, 선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신물이 났다. 그 외에는 다른 게 없단 말인가? 선자는 노아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해주기 위해서 고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자신이 물처럼 들이마셨던 수치를 견뎌내도록 가르쳤어야 했을까? 결국 노아는 자신의 출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고생이 닥칠 거라고 말해주지 않는 게 엄마들의 잘못일까?”

인생은 대개 고난으로 점철된 것이지만,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리저리 내팽개쳐진 개개인의 삶은 표현하기 힘든 장엄한 비극이다. 비록 역사는 이렇듯 사람 하나하나의 삶을 비틀어놓고 도도히 흘러가지만, 그 안에서 사람이기에 또 이렇게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파친코’라는 책 제목은 일본의 기간산업이라는 자동차 산업보다 규모가 크고, 샐러리맨부터 장바구니를 든 주부까지 모두 드나드는 그리하여 일본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경제,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며 그 많은 부분을 자이니치가 담당하고 있다는 면에서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의 존재를 설명하기에 더 없이 적절하게 보였다.

이 책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꼭 읽어야할 책으로 추천해서 화제가 되었고, 뉴욕타임스가 ‘올해의 책’으로 그리고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으로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처음 책을 읽을 때에는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들이 나오는데 외국 소설을 읽는 듯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낯설었지만 –번역서이니 당연하게 -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이 그러한 어색함을 금방 잊게 하였다.

1992년 일본에서 주최한 어떤 회의, 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통역으로 만났던 재일교포 두 분과 그 분들과 더불어 만났던 교포 2세, 3세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전차 안에서 약간 술에 취한 것 같은 중년의 일본 아저씨가 강코구에서 왔냐고, 잘 있다 가길 바란다고 웃으며 말했는데 날카롭게 반응하던 두 분의 모습이 아프게 되새겨졌다. 저런 일본인들의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일본행, 분단된 조국으로 인해 더욱 어려운 자이니치로서의 처지, 안타깝고 눈물겨웠지만 내 이해도 지극히 표피적인 것이어서 그 분들의 날선 반응에 속으로 ‘뭘 그렇게까지 심하게 반응하시나, 그냥 술 취한 아저씬걸(술 취한 아저씨란 동서고금 다 싫은 법이니까)’했던 것이 아프게 반성되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신귀성 선배, 김영호 선배.

이숙현 편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