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인생(217)

영화이야기

어미

감독 박철수

출연 윤여정, 전혜성, 신성일

방송작가 홍경애(윤여정)는 고등학생 딸 나미(전혜성)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간다. 재혼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연배의 최 교수(신성일)와 연애를 즐긴다. 어느 날 최 교수와의 데이트 때문에 나미를 데리러가는 시간에 늦어버린 경애는 허둥지둥 학교로 달려가지만,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나미는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어 사창굴에 팔려간 것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경애가 간신히 딸을 찾아냈을 무렵에 나미는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다. 경애의 간절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미는 결국 자살에 이른다.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하는 아카이브 프로젝트 <다큐 인사이트-모던 코리아>의 ‘짐승’ 편을 보면서 새삼 1980년대의 기억을 떠올렸다. 1980년대를 거쳤던 이들이라면 ‘봉고차 인신매매’에 대한 이야기를 알 것이다. 어느 정도는 현실에 기반 했고 또 어느 정도는 과장된 허구가 섞여 들어갔을 괴담 말이다. 유치원 꼬마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이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온갖 주의 사항을 들었다. 밤길 늦게 다니지 마라, 큰길에서도 늘 조심하고 봉고차가 보이면 도망쳐라, 낯선 사람과 절대 말을 섞지 마라 등등. ‘정조와 순결’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가치처럼 떠받들어지던 시절이었다. 바깥세상의 위험을 알지 못하는 여성의 순진함은 근심의 대상이었고, 반대로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여성의 경계심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질책의 대상이었다. 여성들은 (성적) 위험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고, 아무것도 모를 만큼 순진해야 하지만 실질적인 (성적) 위험이 닥쳤을 때에는 그것을 용감하게 막아내야 한다는 모순된 요구를 받던 시절이었다. 깨부수고 나올 만큼 용감해야 한다는 모순된 요구들이 여성에게 닥치는 대로 가해지던 시절이다. 1985년 극장가를 강타했던 영화 <어미>도 동시대의 익숙한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미>의 각본을 쓴 사람은 바로 TV 드라마계의 거장 김수현 작가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즐겨 시청한 사람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정말 뻔해 보이는 소재, 너무나 익숙한 장면으로 출발하지만 그 전개 과정과 결말은 예상과 완전히 달라진다. 혹은, 사람들이 어떤 지점에 가장 공감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는지를 정확히 꿰뚫는 예리한 통찰력을 통해, 뻔하더라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흡인력을 발휘한다. <어미>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가 놀라워지는 지점은, 위에 기술한 줄거리 이후부터 시작된다. 하나뿐인 딸의 죽음 이후, 공권력의 힘을 빌릴 수 없는 극도의 불행 앞에서 엄마는 사적 복수를 감행한다. 딸의 납치범들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하나하나 처단하는 것이다.

<어미>에는 분명히 당대 현실과의 타협이 존재한다. 나미의 추락의 일차 원인이 엄마에게 있다는 강한 질책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연애를 즐기느라 정신없어서 십 대 딸이 밤길에 혼자 걷게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식이다. 그리하여 나미를 위한 경애의 복수에는 끝내 스스로를 처벌하는 자학적인 심리도 포함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뜨는 자막은 다음과 같다. “어미는 새끼를 지켜야 한다. 환경이 아쉽다. 딸에게 용서를 빈다.” 사실 이 모든 사건의 일차 원인은 엄마 경애가 아니라 인신매매범들에게 있고, 여성의 성을 구매하는 남성 소비자들의 수요가 너무나 많았던 당시 사회의 잘못이 더 크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 고발과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멈춰 서서, 불행을 사적으로 처단하는 엄마의 하드보일드한 스릴러로 뭉뚱그렸다. 여자의 불행을 엄마의 힘으로 되갚는다는 설정으로, 1985년의 여러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끔 <어미>를 리메이크하면 정말 멋지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렇게 흘려보내기엔 영 아까운 영화다. 물론, 1985년 작에 자주 등장하는 쓸데없이 에로틱한 장면(대단히 끔찍한 강간 장면이지만 그것을 눈요깃거리로 삼는다는 의도가 너무나 분명한 장면들)을 다 쳐내고 말이다.

김용언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