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인생(237) 

말 없는 소녀

감독 콤 베어리드

출연 캐서린 클린치, 캐리 크로울리, 앤드류 베넷

1980년대 초, 아홉 살 소녀 코오트(캐서린 클린치)는 말수가 적다. 좁은 집은 북적북적하다. 세 명의 언니, 어린 동생 하나, 그리고 곧 만삭의 엄마로부터 태어날 또 다른 아이, 알콜중독과 도박, 외도까지 밥 먹듯이 저지르는 무책임한 아빠, 연이은 출산과 가사 노동에 짓눌려 기력을 소진한 엄마.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가벼운 학습장애까지 있기에, 학교에서도 코오트는 아무 말 없이 숨죽인 채 교실 한구석을 조용히 지킨다.

엄마는 막내가 태어날 때까지 제일 얌전한 코오트를 친척 에이블린(캐리 크로울리)과 션(앤드루 베넷) 부부에게 보내기로 결정한다. 자신이 ‘치워져 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이가 모를 리 없다. 코오트는 낯설기만 한 에이블린과 션 부부의 집에서 잔뜩 긴장한 채 하룻밤을 보내고, 결국 매트리스 위에 소변을 지리고 만다. 하지만 에이블린은 나무라거나 놀리지 않고, 아이의 손을 잡고 차갑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을 보여준 다음 요리 준비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아이는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배우고 어른들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한다. 에이블린은 처음부터 코오트에게 친절했지만, 션은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코오트를 못 본 척한다.

줄거리만 보더라도 루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을 연상시킨다. 다만 앤 셜리는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활발한 덕분에 고요한 커스버트 남매의 집을 순식간에 들쑤셔 놓으며 격렬한 변화를 가져왔지만, <말 없는 소녀>의 주인공들인 코오트와 에이블린, 션은 침묵을 더 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다만 이들이 지키는 고요함에는 몇 가지 층위가 있는데, 먼저 코오트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강요된 침묵이다. 가족 사이의 무심한 방치는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동학대와 다를 바 없다. 코오트를 물리적으로 학대하지 않더라도, 제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거나, 학습장애에 대해 신경 써 주는 어른의 부재로 계속 방치된다거나, 도박 결과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아이가 옆에 있건 말건 욕설을 퍼붓고 분노를 터뜨리며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거나. 코오트는 이 시끄럽고 불안한 소음 속에서 눈치껏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아이가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칠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혼자 흐느끼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구석에 조그맣게 숨는 건 아이가 나름대로 터득한 생존 전략이다. 하지만 에이블린과 션의 집에서 코오트는 다른 침묵을 배운다. “아무 말 안 해도 돼. 언제나 그걸 기억하렴.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었단다.” 강요되다시피,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침묵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침묵.

영화는 코오트의 속내를 전부 말로 설명하거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코오트를 둘러싼 자연의 풍부한 변화를 화면의 중심에 둔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며 소떼와 양떼가 먹이를 찾아 보채는 울음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에 와 닿는 그 모든 풍경이야말로 코오트가 안정과 평화를 찾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여기가 자신이 있어도 되는 곳인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며 불안해하는 것이야말로 어린 시절 가장 큰 걱정과 공포의 근원이라고 할 때, 코오트는 에이블린과 션의 집에서 비로소 ‘나의 장소’이자 ‘나의 집’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아이에게만 미치지 않는다. 에이블린과 션에게도 고통스러운 비밀이 있었고, 부부는 코오트를 보살피고 마땅한 사랑을 선사하면서 자신들의 쓰라린 실패의 상처까지 조금씩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말 없는 소녀>에는 코오트의 달리기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초반부에 코오트가 학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운동장을 질주해서 담을 넘어 도망치던 뒷모습, 중반부에 션이 “너는 다리가 길어서 잘 뛰겠구나”라며 연습을 시킬 때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힘껏 달리면서 서서히 자신의 몸을 제어하는 능력을 배우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에이블린과 션에게 셋만의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미친 듯이 자동차 뒤를 쫓아가던 질주. 아이는 지금 당장 자신이 원하는, 또 자신을 원하는 가족을 선택할 수 없지만, 두 달여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억눌린 내면을 포용할 수 있고 확장 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것은 코오트에게도, 또 사랑을 잃어버렸던 에이블린과 션 부부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본질적인 변화다. 말 없고 수줍은 아이의 내면이 바뀌는 순간, 세계가 달라진다.

김용언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