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가족법 개정운동 60년사* ④

신민법 제정과 1차 가족법 개정 1948~1962

제1장 가족법 개정운동의 시작 (3)

3. 민법 개정운동의 신호탄

법전편찬위원회가 민법 친족상속편의 축조기초를 완료한 것은 1952년 7월 4일이지만 그 후 다시 정리하여 정부로 이송한 것은 1953년 9월의 일이었다. 민법 초안은 정부 내에서도 큰 진통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장경근의 ‘민법 친족상속편 요강 사안’은 점진적 개혁에 역점을 두고 있었는 데 반해 김병로 위원장의 초안은 오히려 일보 더 후퇴하여 ‘전통 고수의 보수성’에 역점을 두었음이 분명해 법전편찬위원회 위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법전편찬위원들의 입장은 대략 세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김병로 위원장의 입장처럼 친족법에 관한 한 ‘논리보다는 관습’을 중시한다는 ‘보수 수호파’와 장경근의 입장처럼 관습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바람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는 ‘점진적 개혁파’, 그리고 신언한의 입장처럼 이미 헌법이 남녀평등 이념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이상 하위법이 위헌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과감하게 개혁을 해야 한다는 ‘급진적 개혁파’ 등.

이 같은 논의가 한창일 무렵 법전편찬위원인 신언한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의 만남은 ‘가족법 개정운동의 불씨를 당기는’ 역사적 만남이 되었다.

1952년 1월 이태영은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또 유일하게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해 3월부터 사법관 시보로 서울지방법원 및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실무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태영이 실습 중인 법원에 신언한 위원이 업무차 들렀다가 법전편찬위원회의 속사정에 대해 개탄하는 말을 했다. 이에 이태영이 자세한 내용을 묻자, 신언한 위원은 “친족상속법이 헌법에 명시된 대로 남녀평등을 따르지 않고 남자 우대, 여자 하대의 관습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태영은 그 길로 여성문제연구원의 황신덕 원장을 찾아갔다. 이태영은 친족상속법이라는 게 어떤 법이고, 지금 그 기초안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진보적인 소장파 위원이 남녀 차별하는 내용을 다 고치자고 했다가 선배들로부터 모욕적인 꾸지람을 받았으며, 신민법이 제정되려는 이때 다시 남녀 차별적인 법이 제정되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등등을 설명하는 데만도 상당한 애를 먹었다.

이태영은 그 뒤 스승인 정광현 교수도 찾아가 의논했다. 정 교수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하나는 신민법 제정에 있어서 성차별 조항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데, 그 방법은 여성단체 이름으로 진정서와 건의문 등을 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들의 권리를 반영시킨 친족상속법 초안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방향도 정해졌고, 그 추진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들은 마당에 어떻게든 운동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52년 봄, 친족상속편 차별조항 철폐를 위한 최초의 진정서를 여성문제연구원을 비롯한 대한YWCA연합회 등 9개 여성단체 이름으로 관계 기관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후 이루어진 가족법 개정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4. 건의문 제출

이태영이 주도한 여성계가 정광현 교수의 지도로 민법 중 친족상속편 제정에 대하여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낼 건의문을 작성한 것은 1953년의 일이었다. 이 최초의 건의문이 여성단체연합 대표 이름으로 국회 및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김병로에게 발송됨과 동시에,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다각도의 개정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대한YWCA연합회ㆍ대한부인회ㆍ대한여자청년회ㆍ대한여자국민당ㆍ여성문제연구원ㆍ대한조산원회ㆍ여자선교단 등 7개 단체가 연합하여 낸 이 건의문, 즉 ‘민법 중 친족상속편 제정에 관한 건의서’는 “전국 여성을 대표하는 본 연합은 남녀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헌법정신에 비추어 종래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증진케 하기 위하여 자에 민법 중 친족상속편 제정에 관하여 건의하오니 심심한 아량과 현명한 영단으로 채택하심을 앙망합니다”라고 전제했다.

이어 ‘건의의 요지’ 및 ‘건의의 이유’를 항목별로 서술했는데, 7개 항으로 된 건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건의의 이유는 『가족법 개정운동 37년사』 42~45쪽 참조)

건의의 요지

(1) 호주권 관계

① 여호주 또는 여호주 될 가녀(家女)가 혼인하는 경우에 당사자간 합의로 부(夫)가 여호주가(家) 또는 처의 부(父)가에 입가할 수 있도록 할 것

② 가족인 여자도 분가할 수 있도록 할 것

③ 기혼여자로서 혼인이 해소된 경우에 부(夫)가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 때나 실가(實家 : 친정)에 복적을 원치 않을 때에는 일가를 창립하여 호주가 될 수 있도록 할 것

(2) 혼인 관계

① 부부동거의 장소는 부부간의 협의에 의하여 결정할 것. 단 협의가 여의치 않을 때는 법원의 결정에 의할 것

② 부 또는 처가 혼인 전부터 취득한 재산 및 혼인 중 자기 명의로서 얻은 재산은 그 특유재산으로 하고 부부 어느 편에 속하는지 분명치 않은 재산은 부부의 공유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할 것(혼인 중 취득한 재산은 공유로 할 것)

③ 약혼 불이행에 대한 위자료 인정과 이혼으로 인한 위자료 및 재산분여청구권을 인정하는 규정을 설치할 것

(3) 친권 문제

① 친권의 행사는 부모 공동으로 행하는 것으로 할 것

(4) 양자 문제

① 양자는 동성동본임을 요치 않을 것

② 성년 이상의 남녀는 기혼 미혼을 불문하고 양자를 할 수 있도록 할 것

③ 양자는 남녀를 불문할 것

④ 배우자 있는 자는 그 동의 없이 양자를 하거나 양자가 될 수 없도록 할 것

⑤ 직계비속녀가 있는 경우에는 사후 양자를 하지 못하도록 할 것

(5) 호주상속인의 순위 문제

① 제1순위 : 피상속인의 직계비속인 남자, 단 수인인 경우에는 연장자로 할 것

② 제2순위 : 피상속인의 가족인 직계비속 여자, 단 수인의 경우에는 연장자로 할 것

③ 제3순위 : 피상속인의 처

④ 제4순위 : 피상속인의 모

⑤ 제5순위 : 피상속인의 조모

(6) 재산상속 문제

① 출가녀의 재산상속분을 남형제와 균등히 할 것

② 배우자의 상속분은 다음과 같이 할 것

ⅰ) 직계비속 및 배우자가 상속인인 때는 3분의 1

ⅱ) 직계존속 및 배우자가 상속인인 때는 2분의 1

ⅲ) 배우자 및 형제자매가 상속인인 때는 3분의 2

(7) 유류분(遺留分) 문제

직계비속인 여자 및 배우자의 유류분에 관한 규정을 설치하여 제6항의 상속분을 침해하는 유언의 효력을 인정치 않을 것

이러한 건의문의 주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호주권 문제에서 “상당한 사회적 활동을 하는 성년의 여자로서 호주권을 인정받지 못한 결과 연하의 비속인 남자의 호주권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은 여자에 대한 큰 모욕이며 사회적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둘째, 혼인 문제에서 “종래 부부 동거의 장소를 부권에 일임한 것”은 헌법 제20조에 위배됨을 환기시키는 한편 “부부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재산을 부의 권리에 속하게 하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셋째, 친권 문제에서 자녀에 대한 보호 및 감호의 권리와 의무에 있어 아버지에게 우선권을 주고 어머니에게 차선의 유보를 두는 규정은 “남녀평등 기본 정신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넷째, 출가녀에 대한 상속분을 인정치 않음은 남녀동등권을 인정하는 현행법 체제에서는 맞지 않으며, 배우자의 상속분을 인정하지 않는 규정 또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현 법률사상과 헌법정신에 배치되는 바이므로 배우자 상속분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남녀평등 헌법정신에 입각한 건의문과 진정서ㆍ호소문이 각 요로에 발송되고, 좌담회를 열고 계몽강연을 갖고 국회의원을 설득하는 일이 황신덕과 이태영에 의하여 꾸준히 진행되는 가운데, 이태영 등은 다시 제2차적인 전략으로 법조계 원로와 관계부처 장관들을 설득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법전편찬위원회가 마련한 친족상속편 초안은 여성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근 6년에 걸친 심의를 마치고, 1954년 9월 30일 국무회의에서 민법 초안으로 통과되었다.

이렇게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친 민법안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1954년 10월 26일 정부 제출법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었고, 같은 달 28일 민의원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어 1955년 3월 15일부터 심의에 들어갔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