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인생(219)

영화이야기

미나리

감독 정이삭

출연 스티븐 연, 한예리, 윤여정, 노엘 케이트 조, 앨런 김

1980년대 초중반 즈음,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부부는 의젓한 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심장이 약한 아들 데이빗(앨런 김)과 함께 아칸소의 외딴 농장에 자리 잡는다. 캘리포니아 쪽에서 살다가 갑자기 낯선 곳으로 이사 오게 된 것에 대해 모니카는 불만스러워하지만, 제이콥은 자신만의 농장을 일구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순자(윤여정)가 딸 모니카를 위해 한국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다. 순자의 가방 속에는 고춧가루와 멸치, 밤과 약초가 가득하다. 앤과 데이빗은 일반적인 할머니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순자가 영 서먹서먹하다.

대사로 언뜻언뜻 제시되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삶에는 제법 큰 굴곡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결혼했고 미국으로 건너와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몇 년을 버텼다. 모니카의 아버지는 6.25 당시 사망했고 엄마 순자가 모니카를 홀몸으로 키웠기 때문에, 모니카는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이 있다. 제이콥은 아마도 농촌 출신으로 추정되며, 부모와 동생들의 희망을 짊어진 장남이다. 부부는 이민 생활 초기에 병아리 감별사로 뼈 빠지게 일하며 돈을 적지 않게 모았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제이콥의 한국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모니카가 이제부터는 두 아이의 미래에 온전히 투자하며 안정된 삶을 꾸릴 수 있겠다고 생각한 찰나, 제이콥은 캘리포니아를 떠나 농장 일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한국의 가족들을 향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간신히 벗어났을 때, 제이콥은 또다시 어린 두 자식들에게 ‘멋진 아빠’, ‘뭔가를 해내는 아빠’가 되어야 한다는 가부장의 새로운 책임감을 스스로 짊어진 것이다. 그는 다짐하듯 데이빗에게 말을 건넨다. “병아리 수놈들은 맛이 없어. 알도 못 낳고. 아무 쓸모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되는 거야.” 하지만 고난은 계속 닥쳐오고, 제이콥과 모니카는 “미국으로 떠나서 서로를 구원해주자”라던 젊은 시절의 약속마저도 희미해지는 걸 느낀다. <미나리> 속 가족은 어쩌면 미국 개척기의 상징과도 같은 이야기,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책 <초원의 집> 시리즈 같은 모습, 건전하고 행복하며 근면 성실한 미국식 가족주의의 화신 같은 모습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립된 곳에서 점점 쪼들리는 삶을 견뎌내는 와중에 한국식 가족주의의 정념이 더 크게 끼어든다면, ‘개척’의 꿈은 전면적인 타협과 수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미나리>의 갈등에는 가족 간의 대립뿐 아니라 인종 간의 상호작용도 포함된다. 데이빗은 앞으로도 백인 친구 조니처럼 편안하게 카우보이 흉내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앤은 나름대로의 친근감을 표시한다며 온갖 아시안 언어의 멸칭을 구사하는 히스패닉계 소녀와 온전한 교우 관계를 맺기 힘들 것이다. 1980년대의 아칸소 주에서 인종을 넘어서는 친밀한 관계가 가능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나리>는 그에 대해 아주 약간의 희망을 남겨둔다. 이를테면 제이콥 가족의 유일한 이웃인, 기독교 광신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딱히 해를 끼치지는 않는 백인 폴이 있다. 폴에게 우월감과 낭패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던 제이콥이 결국 영화 말미에 이르러 ‘여기선 여기의 방법을 따라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폴의 애초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해 촉발된, 미국 내 아시안계를 향한 증오 범죄의 현재 진행형을 아예 잊을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고 여기저기 다 넣어서 요리할 수 있는 ‘원더풀’ 미나리라는 상징을 통해 이미 미국에 뿌리내렸고 그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인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영화 <미나리>의 방식은 상당히 세련되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미나리>를 보면서 계속 마음이 쓰였던 존재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장녀 앤이다. 데이빗처럼 병약하지 않고(그래서 부모가 크게 신경쓸 일이 없고), 조숙한 공부벌레의 기질이 보이고, 엄마가 힘들어하면 그 옆에 앉아 제법 위로를 건넬 줄도 아는, 그야말로 한국 가정에서 ‘큰딸’에게 기대하는 모습 그 자체의 앤. 아버지 제이콥의 흔들렸다 무너졌다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접하며 성장하게 될 데이빗과 달리, 앤이 모니카와 순자의 험난한 삶을 지켜보며 어떤 결심을 하게 될지에 대해, 한국의 여성 관객들이라면 씁쓸한 예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언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