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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Legal Aid Center for Family Relations 모든 가정의 수만큼 답이 있는 곳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걸어오신 길

이태영선생님께서 생전에
걸어오신 길을 안내해드립니다.
1990년대
1998
12.17이 땅에서 헌신의 삶을 다 하시고,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시다.
.제12회 춘강상 여성지도부문 첫 수상자가 되시다.
1995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직을 물러나시다.
.제1회 자랑스런 이화인상을 받으시다.
1993
.세계 감리교 총회에 참석 강연하시다.
1992
.평양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3차 토론회에 참석하시다.
.3·1 문화상 수상하시다.
.「가족법 개정 37년사」 펴내시다.
1991
.용신봉사상을 받으시다.
.제1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에 선정되시다.
.「나의 만남, 나의 인생」 펴내시다.
1990
.국민훈장 무궁화장, 여성전문인상 받으시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초청 강연하시다.
1980년대
1989
.통일원 고문이 되시다.
.브레넌 인권상 수상하시다.
1988
.「북한여성」 펴내시다.
1987
.「여성으로 태어나서」 「한국의 이혼율 연구 Ⅱ」 펴내시다.
1986
.국제법률가위원회 부회장에 피선되시다.
.이화여자대학교 100주년 기념 공로표창장 받으시다.
1985
.미국 하버드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강연하시다.
.유엔세계여성대회에 참석하시고 강연하시다.
.「쪽박으로 한강물을」 펴내시다.
1984
.세계감리교 평화상 받으시다.
1982
.유네스코에서 주는 81년도 인권교육상을 받으시다.
.「자녀양육에 관한 연구」(공저)를 펴내시다.
1981
.미국 뉴저지 드류대학에서 부군인 정일형 박사와 함께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시다.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되시다.
.「북한의 여성생활」「차라리 민비를 변호함」「한국의 이혼율 연구Ⅰ」 펴내시다.
1980
.'서울의 봄’을 맞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하시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강연하시다.
.국제소롭티미스트 회장으로부터 여성을 돕는 여성에게 주는 상을 받으시다.
1970년대
1979
.전 미국 장로교 여성총회에 참석, 주제강연 하시다.
.「행복의 발견」펴내시다.
1978
.감리교 세계여선교회 아시아 지역대회에서 주제연설 하시다.
.세계법률구조협회에서 수여하는 제3회 세계법률구조상을 받으시다.
.「현대여성의 모랄」 펴내시다.
1977
.당시 유신정권 아래 짓눌린 인권상황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시다가 1976년 명동 3·1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시다.
1976
.이 땅 모든 여성과 약자들의 집이 될 ‘여성백인회관’을 세우시다.
1975
.눈부신 활동의 결과, 라몬 막사이사이상의 사회지도부문 수상자가 되시다.
1973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17차 세계여자변호사 회의에 참석, 부회장에 피선되시다.
.법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 부회장으로 일하시며 가족법 개정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시다.
1972
.모나코에서 열린 제14차 세계변호사회에 참석하여 50년 역사상 여자 변호사로서는 최초로 개회사를 하시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부터 제4회 법률문화상을 받으시다.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 펴내시다.
1971
.제1회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을 받으시다.
1970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시다.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와 부회장을 지내시다.
1960년대
1969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이혼연구」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시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기초발기위원이 되시다.
.새싹회 장한어머니 상을 받으시다.
1965
.한국법학원 이사가 되시다.
1964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와 자매결연을 맺으시고, 법률임상교육을 시작하시다.
.가족법학회 부회장을 지내시다.
.루스벨트 여사 자서전 <나 홀로 걷는 길>을 번역하여 펴내시다.
1963
.가사심판법 기초위원으로 일하시다.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으로 부임하시어 1971년까지 여성 법학자들을 키워내는 일에 성심을 다하시다.
.1977년까지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을 지내시다.
1962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가정법원 설치를 제안하시다.
1914
~1958년
1958
.세계여류법률가협회에 가입하시어 부회장이 되시다.
「가정법률상담실기」 펴내시다.
1957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이혼제도연구>로 법학석사 학위를 받으시다.
.미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1958년 까지 미국사법제도를 시찰하시며, 남가주 법과대학에서 수학하시다.
1956
.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모체가 되는 여성법률상담소를 창설하시어 이 땅의 가난한 자, 억울한 자, 불행한 자, 약자를 위한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시다.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인권옹호상을 받으시다.
1952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사법관 시보, 서울지방법원 및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실무 수습하시다.
.야당 정치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판사 임용을 거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시다.
.청원서, 진정서 제출을 통한 가족법 개정운동 시작하시다.
1949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시다.
1946
.32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시다.
1936
.이화전문학교 가사과를 수석 졸업하시고, 평양고등성경학교 교사로 부임하시다.
.일생의 동반자가 되셨던 금연 정일형 박사와 혼인하시다.
1931
.평양 정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시고 북진읍 광동 보통학교 교사가 되시다.
1914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 진동에서 태어나시다.

남기신 말씀

1 1957년 국회 민법초안 공청회에서

“혼인 성립에 있어서 형식혼주의를 원칙으로 하되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일지라도 동거생활을 오랫동안 했다거나, 소생자녀가 있다거나, 기타 사회적으로 부부로 인정할만한 조건을 구비한 자라면 남편 아내 또는 그 자녀들의 신청이 있으면 법원의 판결로써 법률상의 혼인관계를 인정하고 선언하는 제도를 신설해야 합니다.”

“그렇게 혈통을 중요시 하는 것이라면 100대 200대 300대로 올라가서 그 혈통을 중요시하는 그러한 논리라면 마지막에 가서 우리의 피가 누구의 피인가 한번 검토해보면 마지막에는 단군 할아버지까지 올라가야할 것이다”

“친족상속법에 있어서 헌법정신이라는 커다란 구호를 내걸고 비추어 보아서 이 헌법정신과 위반되는 제도가 있다면 용단을 내려야 합니다. 남성이 보는 입장에서는 순풍미속이 될는지 모르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들여다본다면 그 풍속과 그 제도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라고 생각된다면 그 순풍미속은 결코 객관적으로 타당한 한 개의 사실로서의 순풍미속이 아닙니다. 한국의 아내는, 한국의 딸은, 한국의 며느리는, 한국의 어머니는 과거의 봉건적인 가족제도로 인하여서 한없이 울고 있습니다. 그 우는 소리를 여러분의 귀로 넉넉히 듣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의 아내요, 가족으로 생각을 하신다면 주저없이 용기가 충분히 나실것입니다. 여러분을 민의원으로 당선시켜 보낼 때에는 민주입법을 제정하실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몰각한 한국 친족상속법의 입법은 잠시도 이 헌법 아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2 상담소의 기틀이 될 500인 재단회원을 모시며

“사랑이 없는 가정이란 참된 가정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죽은 가정이라고 믿습니다.
"가정의 행복이 모아져 사회의 행복이 되고 사회의 행복이 모아져 인류의 행복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3 제3차 가족법 개정 직후

“가족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오백년 묵은 인간차별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으니 축하한다고 말해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 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노릇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가족법이 ‘여성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 모두의 법’이잖습니까.”

4 1994년 3월 <가정상담> ‘이달의 메세지’에서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돈이나 사람이나 권력으로 지탱하는 사업은 결코 장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웃과 함께 오로지 사랑으로 지탱해온 우리의 사업은 그 생명이 영원할 것입니다.”

5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 최후변론

“검찰관님 오늘 권양에 대한 논고가 양심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까.
마치 오늘이 대한민국의 종말인 것처럼 이 정권에 무릎을 꿇고 인생을 출발하시렵니까.
국가와 민족은 영원하며 검사님은 대한의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6 1990년 5월 20일 <한국일보> 여성저널 인터뷰 중에서

이태영 박사의 업적과 화려한 수상경력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시대에 그 같은 여성을 가질 수 있었던 기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시대의 한국인 중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인 그를 만나 그의 삶과 일에 대해 들어본다.

Q. 선생님이 이 나라 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된지 40년이 가까워옵니다.
그토록 일을 많이 하신 것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사명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까?

이제 와 생각하니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같은 일을 하도록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고 할까요.
내가 32살에 법학공부를 시작했던 것, 고등고시에 합격했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의원 마누라’라고 판검사 임명을 안해줘 변호사가 되었던 것, 상담소를 차려 법률구조사업에 뛰어들었던 것, 여성단체들과 연합하여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다가와 짐으로 지워졌는데 어느덧 그 짐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변해갔지요.
그 일들을 하는 동안 어떤 다른 일도 나의 관심을 끌거나 나를 유혹하지 못했어요.

Q. 선생님의 석사·박사학위 논문은 이혼연구였고, 상담소에서는 파탄에 이른 가족들을 상담해오셨는데,
이혼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파스칼이 말하길 ‘만일 천사라면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짐승이라면 이혼이 필요없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참 옳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도저히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일 때 이혼하는게 낫지만 그러나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최대한 노력해야 하고
더구나 자녀가 있을 경우 가능하면 이혼하지 않는 것이 부모된 자의 윤리, 도덕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헤어지려는 부부를 상담할 때 늘 그들 자녀의 입장에 서서 할머니의 마음으로 이혼을 막으려고 애쓰곤 합니다.

Q. 결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시겠습니까?

결혼은 성장배경과 교육이 다른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므로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에요.
나한테 꼭 맞는 상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야말로 큰 오산입니다.
남편이 생전에 주례를 서면서 늘 강조했던 말이 ‘사랑의 나무에 물을 잘 줘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결혼생활에서 ‘남편에게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말을 늘 해왔는데 그러나 먼저 준 것은 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옥살이하는 남편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부터 나는 가난한 살림 속에 팔을 걷어붙이고 소처럼 부지런하게, 힘차게 일했어요.
‘소’라는 내 별명은 그때부터 얻은 것이에요.

대담 : 장명수(편집국 차장 겸 생활부장/현 한국일보 주필·이사)

창설 이념

이태영 선생님과 상담소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인간의 존엄성과 법 앞에 만인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 억울한 자, 행한 자, 약자 등 번민하는 이웃의 편에 서서 이들의 인권옹호에 필요한 모든 법률적 구조사업을 무료로 제공하고 인권을 회복함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오랜 경험을 통해 가정의 평화는 곧 사회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로 이어진다는 결론을 얻은 상담소는 그것을 실현시키는 데에도 목적을 둔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창설 이념은 곧 상담소 창설자인 이태영 선생의 평생 신념이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서 자신의 특출한 재능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의 억압받는 모든 이를 위해 바쳐온 이태영 선생의 일생이 집약된 곳이 바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인 것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건물 여성백인회관의 벽돌 한 장 한 장에 이태영 선생의 피와 땀과 평생의 수고가 서려 있다.

1956
여성법률상담소
창설
1970
국제 법률구조협회
회원으로 가입
1976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호 변경
1977
동성동본혼인문제
신고센터 설치,
무료 결혼식 시작
1988
민간단체 최초의
법률구조법인으로
등록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로 출발한 상담소는 이 땅에 최초로 탄생한 법률구조기관이었다.
1966년 8월 가정법률상담소로 이름을 바꾼 상담소는 여성의 권익뿐 아니라 남녀 모두의 권익을 위한 인권기관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며 같은 해 법무부의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이 되었다.
1970년 국제 법률구조협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그 이사국이 되어 국제적인 발전의 발판을 열었다.
1976년 가정법률상담소에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으며 공익법인이 되었다. 같은 해 숙원 사업이던 여성백인회관을 준공했다.
1977년에는 가족법 개정을 위한 동성동본혼인문제 신고센터를 설치하고 ‘목요법률강좌’를 신설하였으며 이동순회상담을 통해 법의 서민화 실현에 앞장섰다. 1977년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혼인부조 사업으로 무료 결혼식을 시작했고,
1988년 법률구조법에 의거 민간단체로는 최초의 법률구조법인으로 등록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우리 나라 최초의 법률구조기관으로써 가정문제 전반에 걸친 상담과정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정문제 예방을 위한 교육사업과 법률개정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를 적극적인 실천에 옮겼다. 그 결과가 교육원을 통한 사회교육 사업과 가족법 개정 운동이었다.
교육원에서는 가족법·재산법·세법강좌, 어머니 학교, 할머니 할아버지 학교, 이혼·사별 등으로 한부모가 된 여성들을 위한 기러기 교실, 시민공개강좌, 혼인준비교실 등이 이루어졌으며, 이 같은 사회교육에 있어서도 상담소는 선구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법률구조 사업에 대한 대학생들의 이해를 높이고 참여를 돕기 위해 196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비롯 각 대학 사회사업·사회복지·심리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법률임상실습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법률에 입각해서는 근본적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돕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여 가족관계와 가정생활을 규율하는 가족법에서의 부부차별· 남녀차별적 요소를 개정하고 폐지하기 위해 지난 반세기 동안 주도적으로 가족법 개정운동을 벌여왔으며 그리하여 1958, 77, 89년의 세 차례에 걸친 가족법 개정이라는 결실을 맺었고 이는 오늘날 호주제 폐지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역사는 곧 이태영 선생의 일생이다.
이태영 선생이 여성으로선 최초로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태영 선생이 야당 인사인 정일형 박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을 거부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땅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하늘의 배려였던 것이다. 판사 임용을 거부당한 이태영 선생은 변호사가 되어, 이웃을 위한 본격적인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성법률상담소를 세운 이태영 선생은 그 후 40여 년간 당신의 인생을 상담소에 바쳤다.

1998년 12월 17일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창설자 이태영 선생을 영원히 떠나 보내고, 그 높고 고귀한 뜻을 이어 이 땅에 법을 통한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태영 선생의 높고 귀한 뜻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담소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창설자의 뜻을 이 세상에 지켜나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저서

저서 표지
[1957] 한국이혼제도연구

여성문제연구원

저서 표지
[1958] 여성법률상담실기

여성문제연구원

저서 표지
[1964] 나홀로 걷는 길

번역,이대출판부

저서 표지
[1969] 한국이혼연구

이대출판부

저서 표지
[1978] 현대여성의 모랄

교학사

저서 표지
[1979] 행복의 발견

인물출판사

저서 표지
[1980] 내인생을 살련다

번역,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저서 표지
[1981]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

인물연구소

저서 표지
[1981] 한국의 이혼율연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저서 표지
[1981] 북한의 여성생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저서 표지
[1982] 자녀양육에 관한 연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저서 표지
[1985] 쪽박으로 한강물을

조선일보사

저서 표지
[1987] 이태영인생론

어문각

저서 표지
[1987] 한국의 이혼율 연구2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저서 표지
[1988] 북한여성

실천문화사

저서 표지
[1991] 나의만남 나의인생

정우사

저서 표지
[1992] 가족법개정운동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저서 표지
[1999] 정의의 변호사 되라 하셨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태영 저술도서
한국이혼제도연구
1957
여성문제연구원
여성법률상담실기
1958
여성문제연구원
나 홀로 걷는 길
1964
이대출판부
가정법률상담실기
1969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한국이혼연구
1969
이대출판부
현대여성의 모럴
1974
교학사
오직 한 뜻으로
1977
물결
행복의 발견
1979
인물연구소
내 인생을 살련다
1980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
1981
인물연구소
한국의 이혼율 연구
1981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북한의 여성생활
1981
민족통일중앙협의회
What can I do?
1981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자녀양육에 관한 연구
1982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어머니들의 책
1982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쪽박으로 한강물을
1985
조선일보사 출판부
법률부조운동 30년의 약사
1986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여성으로 태어나서
1987
어문각
한국의 이혼율연구2
1987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북한여성
1988
실천문학사
나의 만남 나의 인생
1991
정우사
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
1992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정의의 변호사 되라 하셨네
1999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태영 관련도서
오직 한 뜻으로 살아오신 이태영 선생님
1982
인물연구사
한국의 법률문화
1982
시사영어사
사랑어머니 이태영
1985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명사 66인이 쓴 내가 받은 가정교육
1985
샘터
현대한국여성론
1986
삼민사
My work my teacher
1987
Ramon Magsaysay Award Foundation
Where there is no path
1988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숨쉬는 여성
1988
드보라출판사
꿈도 미래도 나의 것으로
1991
청조사
시간은 여기 남고 흘러가는것은 우리들이다
1991
서울문화사
길을 묻는 그대에게
1993
삼성미디어
나의 길 나의 삶2
1993
동아일보사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1994
경세원
어머니 당신의 사랑으로
1997
진흥
이야기여성사1
2000
여성신문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2001
대한교과서
남녀 평등의 길을 연 변호사 이태영
2005
웅진씽크빅
한국여성의 인권을 찾아: 이태영 변호사의 재조명
2005
서울대학교 BK21 법학연구단 공익인권법 연구센터

사진 모음

이태영박사 생전 사진

1932년
입학한 이화전문학교 시절

1936년
이화전문학교 가사과 수석 졸업.
평양고등성경학교 교사로 부임.
정일형 박사와 혼인

1952년
제 2 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이승만 대통령의 판사 임용 거부.
우리나라 최초의여성 변호사가 됨.
가족법 개정운동 시작

1957년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이혼제도연구」로
법학박사 학위 받음.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1958년까지
미국 사법제도를 시찰하고
남가주 감리교대학에서 수료

1969년
서울대학교에서「한국이혼연구」로
법학박사 학위 수여.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기초발기위원.
새싹회 장한어머니상 수상

1964년
이화여대 법정대학 학장 시절

1969년
상담소에서 어제의 상담활동을 살펴보며


번민하는 이웃과 함께 상담


기도로 여는 상담소의 아침회의

1972년
제14차 세계변호사회에 참석 50년 역사상
여자 변호사로서는 최초로 개회사를 함

1972년
제4회 법률문화상 수상.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 발간

1972년
제4회 법률문화상 수상.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 발간

1975년
막사이사이상 사회지도 부문 수상

1975년
막사사이상 수상 축하회에서 강원용 목사와

1975년
막사사이상 수상 축하회에서 함석헌 선생과

1975년
막사사이상 수상 축하회에서 상담소 직원들과

1976년
5월 10일 여성백인회관 기공식

1977년
12월 8일 상담소를 찾기 어려운
서울 외곽 지역의 이웃들을 위해
순회상담 시작

1977년
10월 5일 여성백인회관 개관

1977년
10월 11일 여성백인회관
개관 및 상담소 21주년 기념 강연회
"오늘의 한국가정을 진단한다"


"이철수에게 완전한 무죄를".
재미교포 이철수 사건을 접한 선생님은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982년 그가 석방할 때까지 보석금을 모으는 등
최선을 다하셨다.

1984년
2월 방한 중인 마더 테레사 수녀와의 만남

1984년
7월 21일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 회장단 회의에서
앞으로의 사업 계획을 논의하시다.

1984년
8월 30일 가족법 개정을 알리기 위해
거리에 선 선생님

1986년
상담소의 주요 사업 중 가정문제 예방을 위한
교육사업 가운데 어머니 학교 입학식에서

1986년
5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창립 30주년 기념 회원대회

1986년
10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창립 30주년 기념식

1986년
10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창립 30주년 기념식

1986년
상담소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회원 작품전에서


상담소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모인 10인 클럽과 함께

1989년
3월 미국 뉴저지 주립대에서 브래넌 인권상 수상 후

1990년
12월 10일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1991년
10월 14일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

1992년
3월 1일 3·1 문화상을 수상하시고

1992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3차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판문점 분계선을 넘어 평양 방문

1998년
12월 21일 이화여대 김영희 홀에서 열린 영결식

상담소 앞 노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