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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길지만 결혼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1)결혼
나와 아내는 2003년 겨울에 내가 다니고 있던 한겨레신문사 후배의 소개로 만났다. 첫눈에 반해 사귀게 되었고 그녀를 뜨겁게 사랑했고 우리는 2005년 가을에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다. 내가 서른둘, 아내는 스물일곱살이었다. 나의 부모는 아주 많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절약하며 열심히 모은 돈으로 강남 대치동 아파트에 사셨고, 아들이 분가할 때 살 전세집 보증금을 마련해주실 정도의 능력은 갖고 있었다. 아내의 친정은 빚이 많다고 들었다. 처가로부터 신혼살림에 큰 도움은 없었지만 한쪽 부모의 지원만으로도 우리가 시작할 기반은 마련할 수 있었으니 그리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2)첫번째 사업 실패
결혼하기 몇 달 전에 나는 한겨레신문사를 그만두고 작은 디자인회사를 차렸다. 가장 큰 이유는 성취감과 돈을 많이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큰 착각이었다. 시작할 때의 큰 기대감과는 달리 내게 맡겨지는 프로젝트의 규모는 대부분 작았고 경기침체나 유동성 위기 같은 말이 나올 때면 제일 먼저 삭감되는 것은 클라이언트들의 홍보 예산이었다. 게다가 클라이언트 중 한 곳의 부당한 저작권 침해에 대한 소송을 시작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쌓여갔다.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소송 비용을 대고 사무실을 유지하기에 급급했고 인쇄 제작 거래처에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빚을 내기에 이르렀으며 그 빚은 점점 불어났다. 우리가 사는 집의 전세금을 담보로 대출을 내기까지 했다.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하게 되자 마음의 짐은 더 커져갔고 아내와 마주치는 것조차 민망했다. 프로젝트 마감이라는 핑계로 사무실 바닥에서 쪽잠을 자며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더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서야 사실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았다. 빚은 부모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대신에 당신들과 한 집에 사는 것이 빚 탕감의 조건이었다. 부모님은 당신들을 모시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며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라는 뜻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사시던 대치동 아파트를 월세로 내놓고 투자목적으로 강동구에 새 주상복합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하는 집에 함께 살게 되었다.
3)재입사, 그리고 분가
2007년 초에 한겨레신문사에서 주말섹션을 만드는 팀을 꾸리는데 디자인팀장으로 재입사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내는 디자인회사에서 국회사무처로 이직을 했고 나는 연세대학교 야간 법무대학원에 진학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다시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되었다. 부모님은 나와 아내가 모은 얼마 안되는 돈에 더해 아내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얻을 전세금을 내주었다. 평범하고 안정된 날들이었다. 부모님은 강동구에 사시던 집을 처분하고 송파구로 이사하시면서 남는 돈으로 영등포시장에 붙어있는 재개발 예정지의 낡은 집을 나와 아내의 공동 명의로 계약했다.
4)새로운 도전과 아내의 임신
야간대학원에서는 지식재산권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 즈음 2010년 봄에 나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여름에 치른 법학적성시험(LEET) 점수는 형편없이 낮았고 그 점수로 갈 수 있는 학교는 없었다. 아내는 내가 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임신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눈물이 날 듯 기뻤다. 하지만 1년을 재수해 로스쿨에 다시 도전해 입학하더라도 3년간의 학업과 변호사시험 준비를 이어나가기에는 당장 세 사람의 생계 대책이 불투명했다. 로스쿨 입시는 단 한 번의 도전으로 끝났고 재취업을 준비하던 중에 태국 방콕의 한인언론사에서 입사 제안을 받았다. 아내의 적극적인 권유로 방콕행을 결정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의 경제적 손실을 만회할 기회였고 새로운 세계에서 우리 세 사람이 살아갈 또 다른 길을 모색해보라는 것이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임신 기간을 버티는 것이 힘들지 않겠냐는 걱정에 장모님이 와서 보살펴 주실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고마웠다.
5)귀국
방콕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게 가지는 못했다. 실제 받은 급여는 처음에 제안받았던 것보다 적었고 몇 개월 후에 인상한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열기에 일정 수준을 넘는 자본이 필요한데 위험요소는 너무 많았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는 이민자들의 삶 또한 녹록치 않았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느니 무얼 하더라도 함께 지내는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해 귀국을 결정했고 아이는 2011년 4월에 태어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큰 뜻과 넓은 아량을 가지라고 태호라는 이름을 지었다. 태호의 혈액형은 AB형. 나와 아내 모두 혈액형이 B형인 줄 알았는데, 아내는 이번에 자기 혈액형이 A형인걸 알았다고 했다. 과거에 혈액형 검사 장비가 허술했던 시절 혈액형 판정 오류가 많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했다.
6)두번째 사업 시작
배운 도둑질이 디자인이라서 다시 디자인사무실을 열었다. 서울시의 창업지원을 받아 상암동에 작은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아내의 출산휴가가 끝나가고 복직을 앞두고 우리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처가와 같은 아파트 옆동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나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단국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교내 창업보육센터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다. 처가 부모의 도움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아내는 살다보니 화성에서 여의도까지의 출퇴근길이 너무 멀어 점점 지친다고 했다. 나도 창업보육센터의 계약기간이 끝나가 용산구에 있는 어머니 소유의 다가구주택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고, 아이도 많이 자라 아내의 직장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게 되어서 우리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돈은 서울에 집을 얻기엔 많이 부족했고, 나의 부모님은 다시 함께 사는 것을 제안했다. 영등포에 사놓은 집은 재개발에 착수해 새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고 건축분담금으로 들어가는 돈은 대부분 아버지로부터 받아 충당했다. 우리가 버는 수입도 거기에 보태기는 했지만 대출이자를 갚는 정도였으니 부모님은 다시 한 번 함께 살면서 생활비라도 줄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시부모가 사시는 집의 작은 방 한 칸에 나와 아내, 아이가 이불을 깔아놓고 지내게 하는 것이 아내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곧 새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을 기다리며 버텨보자고 했다.
7)새 아파트 입주와 업종 전환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했다. 모든 것이 최신식이고 시야가 넓게 트인 24층에 살게 되었다. 사무실을 닫고 요식업의 길에 들어섰다. 내가 세들어 쓰고 있던 용산 해방촌집을 어머니가 파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 디자인사무실을 꾸려나가던 중에 세입자가 나간 윗층을 게스트하우스로 예쁘게 꾸며 숙박업을 겸했는데, 해방촌 부동산 시세가 오른데다 게스트하우스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싶다는 매수인이 나타나 어머니는 주변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집을 매도하셨다. 그 즈음에 부모님은 당신들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천천히 유산을 정리해야 한다며 또 꽤 많은 돈을 보태주셔서 우리는 투자목적으로 용산 청파동에 작은 다가구주택을 매입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조금 있는 것 같고 손재주가 있으니 집을 꾸미거나 고쳐 가치를 높이면서 재산을 불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셨다. 나는 건너건너 아는 분이 운영하던 프랜차이즈 피자집을 양수해 운영하기로 했다. 디자인사무실을 하면서도 벌이는 여전히 시원찮아 겨우겨우 꾸려갔었고 그나마도 사스니 메르스니 하는 전염병이 돌면 제일 먼저 삭감되는 것은 홍보 예산이었다. 디자인과 게스트하우스로 버는 돈은 대부분 어머니에게 드리는 월세와 사무실 운영비로 들어갔고 집에 가져다 주는 돈은 얼마 안되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는 말처럼 시원섭섭하게 20년 가까이 하던 일을 정리하고 피자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먹는 장사를 하면서 좋은 것은 매출이 곧바로 현금화가 된다는 것이었다. 겉보기 번지르한 디자인 대행업은 프로젝트를 시작해 마무리짓고 결제 청구로 이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러가지 핑계로 수금이 지연되거나 심지어 금액이 깎이기도 해서 애를 태우기 일쑤였는데, 그런 나에게 요식업은 신세계였다. 피자 한 판을 만들어 팔면 피자 한 판 값을 바로 받는 정직한 것이 먹는 장사다.
8)아내의 새로운 취미와 목동 이사
새 아파트로 이사하고 아내는 골프를 시작했다. 나는 골프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꽤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고급스러운 레포츠인 것만은 알고 있다. 딱 한 번. 아내의 취미생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아직까지 우리 형편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는 골프를 하는 건 사치 아니냐는 질문에 아내는 그동안 집에 생활비조차 제대로 가져온 적이 거의 없는 주제에 자신이 버는 돈으로 누리는 취미생활에 내가 딴지를 걸 권리는 없다고 했고, 그건 일부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자존감은 무너져 내렸다.
아이는 물만 줘도 잘 자라는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 영등포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가 2학년이 되자 아내는 목동으로 이사하자고 했다. 당시에 아이가 다니던 학원들이 목동에 있었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더 많은 학원을 다니게 될 것이고 중고등학교 진학에 대학입시까지 생각하면 영등포보다는 목동이 아이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이라는 이유였다. 나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입주한지 얼마 안된 새 아파트를 팔고 낡은 목동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이 말이 옳은 선택인지 다시 생각해보라고, 학교와 학원들을 뺑뺑이 돌다 지쳐 집에 돌아와 숙제에 파묻혀 사는 것이 아이와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아내의 완강한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내는 어렸을 때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친구들 다니는 학원에 보내달라는 얘기도 못하고 남들 받는 과외 한 번 받은 적 없어서 우리 아이는 힘 닿는 데까지 다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2019년 초여름에 새 아파트를 팔고 목동1단지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전세보증금을 빼고 남는 돈으로 이번에는 마포구 망원동의 오래된 다가구주택을 샀다. 한시적 2주택자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어서 얼마 뒤에 청파동 집을 매도했다. 청파동 집을 처분하면서도 이윤이 좀 남았고 몸이 아프도록 일을 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9)피자가게를 정리하자 찾아온 코로나
피자집 장사는 현금을 바로 쥘 수 있다는 면에서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 또한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었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던 저질 체력에 하루종일 서서 하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에 부쳤고, 조금 적응이 되고나니 여기저기 몸이 고장나기 시작했다. 3년 정도 요식업 장사를 하면서 허리와 발목, 어깨 통증에 시달렸고 한 번은 엄지손가락 인대가 끊어져 수술을 받기도 했다.
매출은 꾸준했지만 임대료와 인건비, 식자재비를 빼고 나면 순이익도 그리 많이 남진 않았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어오르고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챙겨가는 이윤도 오르는 반면 제품 가격을 인상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이것저것 떼고 나면 집에 가져다 주는 돈은 점점 줄어들었다. 프랜차이즈 피자집을 탈출해 내 가게를 다시 시작하려고 결심해 양수인을 찾기 시작했다. 새로 시작하려는 아이템은 태국 국수였고 몇 달 태국에서 머물며 배울 요리학교와 연수할 현지 가게, 숙소,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중 피자가게를 양수하겠다는 분이 나타났다. 가게를 보러 와서 일사천리로 계약을 했다. 뉴스에서는 중국에서 시작한 신종바이러스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잔금기일을 며칠 앞두고 우리나라에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2019년 겨울 코로나는 순식간에 전세계를 뒤덮었고 태국행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하늘길은 막혔고 요리학교를 비롯한 모든 예약을 취소했다. 아내는 나에게 지금 당장 어떤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당분간 코로나 추이를 지켜보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솔직히 남편이라는 자가 지금까지 나가서 뭔가를 해도 가계에 큰 도움을 못 주고 있었고, 맞벌이를 한다고 둘 다 집을 비워 가사도우미나 아이를 케어해주는 이모님에게 지급하는 돈을 생각하면 아내의 말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시적 가사노동자가 되었다.
10)목동에 새 집 짓기, 처음으로 아내를 의심하다.
2020년 봄학기에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모든 학교의 수업이 온라인 전환되었다. 목동으로 이사해 겨우 한 학기를 다니고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지만 아이는 하루 종일 사랑하는 아빠랑 지내게 되어 너무 좋다고 했다. 3월에 아내는 특별한 휴가를 주겠다고 했다. 피자가게를 하면서 고생했으니 2주 정도 제주에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 것이었다. 첫 며칠은 혼자 돌아다니고 중간에 아이와 아이 친구네 가족이 합류해서 함께 여행하고 또 나머지 일정은 혼자 여행하는 일정이었다. 여행중에 아내가 예약해둔 꽤 좋은 호텔에 며칠 묵었는데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오아무개 국장님 도움으로 예약한 곳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여행을 하고 돌아와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늦은 가을 어느 날 아내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받았다며 내년에 집을 이사해야 한다고 했다. 2년 실거주 기간을 채우기 위해 집주인이 들어와 살아야 하니 전세 계약기간이 끝나는 2021년 6월에 집을 비워달라는 얘기였다. 부랴부랴 새로 옮길 집을 알아보는데 한참 전세값이 오르던 때라 우리집 보증금으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얻을 수 있는 집은 없었다. 가끔 산책을 다니는 큰길 건너 단독주택지역은 어떻냐고 물었다. 아이의 학교나 학원을 옮기지 않아도 되는 가까운 곳에 싸게 나온 2층짜리 낡은 단독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매수비용과 설계 시공비용을 합쳐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 전세금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 와중에 아내는 취미생활에 열심이었고 “머리를 올렸다”고 자랑했다. 처음으로 연습장이 아닌 컨트리클럽 이른바 필드라는 곳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게임을 하는 걸 머리를 올렸다고 표현하는 모양이다. 내가 아는 “머리를 올렸다”는 건 옛날에 술집 기생이 기둥서방을 만나 첫 처녀를 바친다는 뜻인데, 내가 모르는 골프의 세계에서는 조금 다른 뜻으로 쓰이나보다. 골프를 치러 다니는 빈도가 잦아졌고 가까운 경기도 지역을 벗어나 강원도나 충청도에 있다는 골프장에도 다녀오곤 했다. 이른 새벽에 나가 늦은 저녁에 돌아올 때는 꼭 술을 몇 잔 걸치고 대리운전을 해서 왔는데, 함께 공을 친 분들과 뒷풀이를 했다고 한다. 같이 게임을 한 사람들은 주로 직장 상사, 동료들이라고 했고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속기과에 근무하는 최아무개 언니, 국회보 담당하는 김아무개 편집장, 법제실 오아무개 국장 등이었는데, 오국장은 연세 지긋하고 매너 좋고 이것저것 도움도 많이 주셔서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아이와 내가 제주 여행할 때 호텔을 예약해줬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아내는 골프를 치는 것이 재미도 있지만 사회생활의 연장이라고 했고 나는 딱히 돈 버는 일을 못하는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 처지는 이상의 소설 <날개>에 등장하는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
골프를 치러 가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한번은 골프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저녁에 메시지를 보내고도 자정을 넘긴 적이 있다. 술자리가 길어졌는데 빠져나오기 미안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앞으론 이런 일 없겠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아침에 회사 간다고 나간 사람이 조만간 퇴사하게 된 동료 라xx씨와 저녁만 먹고 들어오겠다더니 자정을 넘기도록 전화 한 통 없이 연락두절이었다. 나는 집 앞에 나가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손에 쥐고 줄담배를 태우며 기다렸고 아내를 기다리며 밤 늦은 시간에 서준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호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녔던 서준이와의 인연으로 친하게 지내는 분이었다. 혹시 회사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고 함께 골프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물었다. 서준엄마는 태호엄마가 그렇게 분별력 없는 사람이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술이 덜 깬 상태로 새벽 두 시를 넘겨 택시를 타고 들어왔다. 라xx씨와 저녁을 먹다가 술을 마셨고 너무 많이 취해 차에서 잠깐 잠이 들었고 차는 회사에 두고 왔다고 했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통화한 라xx씨는 휴가라서 집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그날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은 것도 이미 확인한 뒤였다. 다시 추궁하니 최xx언니와 둘이 골프를 치러 갔다고 했다. 차에서 발견한 포천 골프장 근처 국밥집 영수증에 있는 번호로 전화해 4인분 식사를 확인하고 다시 캐물어보니 그제서야 같은 과에 근무하던 신xx씨, 위xx사무관도 함께 갔었고 남자들과 골프치러 간다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거짓말했다고 한다. 이미 거짓말이 낳은 거짓말을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지어내는 상황. 막장 드라마같은 스토리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도대체 이 사람이 얘기한 누구랑 골프를 친 것이 사실인지 어디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별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내가 괜한 걸 의심하는 미친 놈인가, 의처증 환자가 아닌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아내는 또 한 번 미안하다며 절대로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내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
11)의문의 메시지
새 집의 리모델링 공사는 철거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늦어졌고 살던 집의 이삿날은 다가왔다. 짐은 컨테이너 창고에 보관하고 공사를 마치고 입주할 때까지 몇달 레지던스에서 지내게 되었다. 코로나 대처단계가 완화되면서 아이는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등교하게 되었고, 학원도 거의 대부분 정상적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주중에는 아이를 학교와 학원에 데려다주고 나머지 시간은 집 짓는 현장에서 공사 진행을 지켜보다가 또 아이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 씻기고 밥지어 먹이길 반복했다. 나는 코로나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 소시지를 만드는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새로 짓는 집의 1층에는 소시지 만드는 작업장을 만들기로 했다. 나름대로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는 그 때의 상황이 참 재미있었다고 했다.
집 짓기가 한창이었던 2021년 여름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당신을 볼적마다 참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와이프가 왜 저 모양인지..진실되고 착한 당신이 아깝습니다..”
“당신 와이프 박주연 직장 내 걸레인거 아세요”
“직장 내 오xx이라는 사람과 불륜입니다”
“통장 확인해보시고 핸드폰 위치 추적해보세요 파주 무인텔 나옵니다”
“국회사무처 법제실장 오xx입니다”
“에라이 이 사람아”
“바보같은 사람”
“오xx법제실장 010-xxxx-xxxx 맞습니다 오xx 실장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해서 거짓으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일단 당신 와이프 통장부터 검색해보세요 그리고 추적해보세요”
그가 보낸 몇 개의 메시지는 한참 전에 온 것이었는데 쌓여 있던 메시지들 속에 있어서 확인이 늦었던 거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고 귀에서는 삐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어 떨리는 손끝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보내신 메시지를 조금 전에 봤는데. 너무 놀라고 손이 떨려서 마음이 진정이 안되네요. 괜찮으시면 저랑 통화하실 수 있을까요.”
얼마 지나 답변이 왔다.
“앗 누구신지요 제가 동명이인으로 착각해서 연락한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보낸 메시지. “아뇨. 맞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국회 박주연 남편이고요.”
그의 답변. “죄송합니다 전 그분 누군지 모릅니다“
이어 내가 보낸 메시지.
“혹시.. 아시는 것 있으시면 숨김 없이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ㅠㅠ”
“제발요. 부탁드립니다.“
“저도 얼마 전부터 아내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좀 있습니다. 아니겠지 넘어가곤 했었는데“
”선생님 말씀 듣고 현기증이 밀려오네요“
“혹시 오xx이 선생님을 회유하던가요?”
그는 마지막으로 “병신같이 멍청하게 살지 말고 모든 것을 의심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계정을 삭제해버렸다. 잠적해버린 사람에게 다시 연락할 합법적인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익숙한 이름 오xx. 아이와 내가 함께 머무를 제주 호텔을 예약해준 사람. 아내가 종종 함께 골프도 치고, 이것저것 도움을 주어서 고마운 게 많다는 그 남자.
12)지옥문.
그날은 무서웠다. 미치도록 무섭고 두려웠다. 온 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처럼 오한이 찾아왔고 쇠망치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야근한다고 늦게 들어오는 아내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숨겨진 또다른 얼굴이 무서웠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나의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이 무서웠다. 내 겨드랑이에 파고들어와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의 해맑은 표정을 보면서 뜨거운 숨을 내쉬며 뜬눈으로 밤을 샜다.
지옥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아내의 행적은 그동안 너무나 의심스러웠고 내 눈으로 그걸 모두 다 확인하기는 두려웠던 것 같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녀가 누굴 만나고 무얼 하고 다니는지 알고 싶었다. 아내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트렁크에 gps 추적기를 달고 한동안 지켜봤다. 블랙박스에 찍인 영상도 함께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 외근하고 식사하느라 늦는다는 날에 한남동 아닌 강남 역삼동의 어느 호텔 주차장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술을 마시고 차를 회사에 두고 왔다고 했던 다음 날에는 새벽에 목동 하이xxx 오피스텔에서 나가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또 어떤 날에는 낮 2시에 같은 오피스텔 주차장에 들어가 저녁 6시에 나온 기록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일 없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귀가한 듯한 모습. 도대체 그 오피스텔에는 누가 살고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재택근무일이라 아이를 케어하기로 하고 오후에 급한 일로 회사에 다녀온다고 한 날에는 인천 청라에 있는 에xxxx 오피스텔이었고, 강릉에 출장간다고 했던 날의 목적지는 성남 판교였다. 영화 <화차>를 떠올렸다. 결혼을 앞두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약혼녀의 행적을 쫓으며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녀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영화 속 주인공은 나에 비하면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아내는 내가 지켜보는 것을 알아챈 눈치였다. 자기를 왜 의심하냐면서 불안해서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이럴거면 이혼하자고 했다. 나에게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고 용서를 비는 아내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내가 잘못했다고 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나는 거친 숨만 내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했다. 10년 전 아이를 낳을 때 자기 혈액형이 A형인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던, 세상에 신기한 일이 다 있다는 아내의 말도 설마 거짓이었을까?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 차마 그것만은 하기 싫었다. 떨리는 손으로 잠든 아이의 머리카락을 뽑았다. 며칠 뒤에 나온 결과는 다시 한 번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단단히 각오는 했지만 “친부자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확인하며 나는 지옥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 내동댕이쳐졌다.
13)아빠가 너무 좋아.
유전자 검사 결과를 확인한 날 이후 몇번이고 지옥문을 드나들었다. 분노와 증오, 용서와 외면 사이를 오갔다. 나의 자아는 여러 갈래로 분열했다. 그냥 깔끔하게 아내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시나리오, 아내와 이런 개같은 상황을 만들어낸 데 힘을 보탠 공범들을 모두 찾아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시나리오, 무엇보다 내가 사랑했던 내 아내와 섹스를 나누고 임신시킨 그 놈만이라도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 개새끼가 누구인지 알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가위를 들고 찾아가 그 더러운 자지를 잘라내 밟아 짓이겨버리고 감옥에 가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나 한 사람 조용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는 시나리오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심장을 옥죄는 고통으로 이어졌다. 간헐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며 찾아오는 부정맥은 두통, 협심증, 구토를 동반했고 변기 앞에 주저앉아 지금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늙고 병들어가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평생 근검하게 모은 돈으로 뒷바라지해주시고 못난 자식새끼 큰 사고 터뜨릴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라며 해결해주시던 불쌍한 내 부모. 막내 손주 귀여운 짓거리 할 때마다 한없이 이쁘다고. 아들 며느리 손자 모자란 것 없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 보다가 가는 것이 유일한 바램이라는 착한 분들에게 내가 겪고 있는 지옥을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으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나는 세상 둘도 없는 패륜아가 되는 거다.
밤이면 꼭 내 품안에 기어들어와 꼬물거리다 잠드는 아이는 아빠가 좋냐 엄마가 좋냐는 물음에 둘 다 똑같이 좋다고 했다가도 귀에 대고 속삭이곤 했다. “엄마한테는 비밀인데, 사실은 아빠가 쪼금 더 좋아.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너무 좋아. 아빠 사랑해.” 속도 모르고 깊게 잠든 아이를 껴안고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며 도대체 너의 진짜 아빠가 누구냐 묻기도 했고, 아무 죄 없는 아이의 너무나 사랑스러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유전자 검사에 오류가 날 수도 있는 거다.
혹시 아이가 바뀐 걸지도 모른다.
아내의 행동에는 내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을 거다.
그게 아니면 어떤가.
한 때 일렁이다 스쳐 지나가는 파도일 뿐이다.
아이가 내 핏줄이 아니면 또 어떤가.
남의 아이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우는 사람도 있는데.
적어도 내 부모님 두 분 돌아가실 때까지만 기다려보자.
그렇게 살다 보면 우리도 늙으면서 잘 지내게 될 거고.
언젠가 옛날에 그런 일도 있었다 담담하게 얘기할 날이 오겠지.
다 내가 못나고 돈 벌어오는 재주가 없어서 이렇게 된 거다.
나만 잘 하면 된다.
이게 다 내가 못난 탓이다.
그렇게 수없이 되뇌이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14)가면
아내와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내기 시작했다. 나처럼 그녀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댁의 가족들과 처가의 가족들 앞에서, 각자의 지인들 앞에서, 그리고 아이와 아이 친구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흉내를 냈다.
집이 완공되어 새 집에 이사를 했고 나는 1층에 소시지 작업장과 매장을 열었다. 집을 짓는 동안에 시공비용이 계획했던 범위를 넘겨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졌고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야 했다. 힘든 고비에 내 부모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때로는 아내의 친구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작업장에 들일 기계를 구입할 때 형수님과 사돈댁의 도움을 받았고 아내는 한도 끝까지 마이너스 대출을 냈다고 했다. 나는 망원동 집을 팔아서 빚을 모두 갚자고 했지만 아내는 계속 값이 오르는 집을 팔면 너무 아깝지 않겠냐며 좀 더 기다리자고 했다. 내 주소지는 망원동 집으로 옮겨놓은 상태였지만 부부공동명의 주민등록상 2년 거주를 채우지 못한 상태라서 팔더라도 양도세가 많이 나올 것이 예상되었다. 아내는 뒤늦게 망원동 집으로 전입신고를 했다.
소시지를 만들어 파는 일은 재미있고 손님들도 좋아해 단골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매출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아주 느리게 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돈 버는 재주가 없는 나는 가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비로 꽤 많은 돈이 들어가고 있는데 정확한 지출을 알 수 없다. 아내는 여전히 취미생활에 열심이고 이사한 뒤로 아내가 구입한 골프 용품과 의류가 택배로 도착하는 횟수는 늘어났다. 아주 추운 겨울을 지나 날씨가 풀리면서 필드에 나가는 날도 늘어났다. 대부분 아주 싼 곳을 찾아다닌다고 했고, 때로는 남의 돈으로 치거나 다른 사람이 어렵게 예약해둔 자리에 펑크가 난 것을 대타로 가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자주 등장하는 이름으로 김아무개 편집장이나 최아무개 언니와 함께 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믿지 않는다. 가끔은 친구들과 만나서 공을 치기로 했다며 비행기를 타고 남쪽 도시로 원정을 다녀올 때도 있다. 골프를 다녀올 때면 뒷풀이를 했다며 술을 몇 잔 걸치고 대리운전으로 귀가를 하는 게 대부분이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그녀의 취미생활에 만만찮게 많은 돈이 들어갈 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녀가 급여로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 나는 모른다. 그녀의 입장에서 나는 집에 돈을 가져다 준 기억이 별로 없는 무능력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수입을 물어본 적이 없고 감히 물어볼 수도 없다.
가끔 생각이 많아져 잠을 못이루거나 고개 숙였던 자아의 조각들이 들고 일어날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나는 품 안에 잠든 아이의 천사같이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좀 더 자라 언젠가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친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15)가면을 벗어던질 타이밍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비겁한 정신력은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우기 위해 아내가 출근하고 아이가 학교에 간 뒤에 비굴한 몸뚱아리를 기절하듯 소파에 드러눕히기 일쑤였다. 늦게 일어나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폭식을 하며 주린 배를 채웠다. 낮에 자고 밤에 작업장에서 일하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내와 마주치는 시간을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늦은 낮에 화장실 거울에서 발견한 나는 퀭한 눈빛에 하얀 머리 가득 까치집을 짓고 뱃살이 축 늘어진 늙은이였다. 이러다 나는 죽겠구나. 높은 데 올라가는 상상을 자주 했고 고기 다루는 날카로운 칼을 만지작거리다 손목이나 모가지에 갖다 대어보는 날도 있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어느 날 찾아간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말기암 선고를 받는다는 상상도 나쁘진 않았다.
5월 초 어느 날. 아내와의 대면을 피해 1층에 내려와 소시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문을 두드려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혹시라도 우리를 에워싼 문제를 함께 해결해보자는 것일까?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해명일까? 단 한 번도 나에게 하지 않았던 사과라도 하고 싶은 걸까?
말문을 연 아내는 내 기대를 벗어나 이혼을 얘기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미 온데간데 없고 서로에 대한 신뢰마저 없는데 아이를 볼모로 구차하게 결혼생활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겠냐고 물었다. 6월 중순이면 거주 2년을 채워 망원동 집 양도세를 감면 받을 수 있으니 팔아서 그동안 조금씩 쌓인 빚을 청산하고 재산을 분할하자고 했다. 망원동 집은 이미 매수인을 찾아 16억5천만원에 내놓았고, 조금 깎아 15억원에라도 매수자가 나오면 팔겠다고 해놓은 상태였다. 세입자 보증금 총액은 5억8천만원. 15억원에 팔리는 것을 상정하고 양도세와 중개수수료, 아내와 내가 지고 있는 부채를 모두 떨어내면 망원동 집을 팔아 대략 5억5천만원 정도의 현금이 확보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금 살고 있는 목동 집은 아이의 중학교 배정이 끝난 뒤에 처분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감시의 눈길을 느낀 뒤로 단 한 번도 편하게 잠을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 같아 늘 괴롭고 불안했으며 신경정신과에서 수면제와 안정제를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난 2년 전 여름에 받았던 페이스북 메시지를 얘기했고, 아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이상한 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오xx국장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오국장에게 불려가서 “너 때문에 국회에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며 영문도 모르는 꾸지람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어렵게 용기를 짜내어 딱 하나를 더 물었다.
“태호가 내 아이가 맞냐”고.
아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왜 그런 걸 묻냐고 반문했고 나는 유전자검사 결과를 얘기했다. 그녀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럴리가 없고 뭔가 잘못되었을 거라고 했다. 눈 앞이 어른거리고 또 오한이 들며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순수한 분노가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올랐다. 그날 밤 친구들과 축구와 농구를 하고 돌아와 피곤했던 아이는 코피를 쏟았고 나는 아이의 코를 막았던 피묻은 휴지를 조심스럽게 지퍼백에 넣었다.
다음 날 유전자 검사를 다시 의뢰했고 며칠 뒤 검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지난 번과 같았다. “친부자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젖은 눈을 닦고 몇 번을 다시 봐도 사무적이고 간결한 활자는 바뀌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대해 볼 것은 딱 하나. 내 아이가 아니란 것은 이미 두 번 확인한 사실이고 유일한 희망이 남긴 했다. 아내와 아이의 친모자 관계 유전자 검사로 확인하는 것이다. 아내의 친자로 확인된다면 아내와 다른 남자가 몸을 섞어 태어난 아이임이 확정된다. 아내의 친자도 아닌 경우. 가끔 티비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류에 등장하는 산부인과나 산후조리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스토리다. 친자를 찾아 데리고 오고싶지는 않다. 사랑으로 키운 태호는 내 아이이니 친부모와 협의해 정식으로 입양하거나 친부모에게 가더라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16)결정의 시간
뜨거웠던 분노는 의외로 빠르게 식어 재만 남기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잠을 놓쳐 뜬 눈으로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 아내를 붙잡아 앉혔다. 이혼 의사와 요구 조건에 대해 다시 물었고 대답 또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재산은 균등 분할. 아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눈치가 남다른 아이라서 부모의 불화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헤어지는 것이 나을 거라고 했다. 언젠가 아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세월이 지나 우리가 서로의 앞날을 응원해줄 수 있는 친구같은 사이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답변을 들을 때까지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주겠다고 조급하게 결정할 것 없다고도 했다.
나는 이미 답을 정해놓았다.
17)나는 살고 싶다.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비굴했던 의지는 뜻밖에 나 스스로를 지키라고 외치고 있다. 이대로 죽으면 안된다. 나는 편하게 잠을 자고 싶다. 아프지 않고 싶다. 웃긴 장면을 보고 마음껏 웃고 싶다. 사치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것을 갖고 싶고 원하지 않는 것은 버리고 싶은 거다. 가고 싶은 곳에 자유롭게 가고 싶다.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싶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소소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18)아내에게.
먼저 빠른 시일 내에 너와 태호의 친모자관계 유전자 검사를 요구한다. 만약에 너와 나 모두의 아이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우리 아이가 산부인과나 조리원에서 바뀐 것이라면 나는 너를 의심한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하겠다. 12년이 넘도록 사랑으로 키운 태호는 우리의 아이니 친부모를 찾더라도 아이가 잘 자라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싶다. 그와는 별도로 사랑과 신뢰가 사라진 우리의 혼인관계는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너의 요구대로 이혼 절차를 밟도록 하자.
만약 너와 태호의 친모자관계가 성립, 즉 너의 아이가 확실하다면 이제 나를 기만하고 가족과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속여왔던 여자와의 관계를 깨끗히 정리하고자 한다.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철저히 나의 아들로 속여왔던 아이를 데리고 내 인생에서 한 톨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주길 바란다.
아이의 친자 여부와 관계없이 재산분할은 기대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에게 사실상 현금성 자산은 거의 없고 부동산이 대부분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의 근원은 모두 내 부모님이 아껴 모아 물려주신 종잣돈이고, 거기에 보태주신 당신들의 쌈짓돈이다. 부동산 매수시 내 선택에 더해 얼마 안되는 운과 시기가 맞아 떨어져 불어난 것일 뿐. 원래 너의 것이 아니었으니 탐내지 마라. 공동명의로 되어있는 목동 집의 소유권은 이혼 절차 진행과 함께 내 앞으로 전환하기 바란다. 공동명의의 망원동 집은 빠른 시일내에 매각하고 기존 세입보증금, 중개보수, 양도세 등 행정 및 세무비용 등을 제외한 매도잔금으로는 목동 집 근저당설정 해제, 나와 너의 개인 채무 변제를 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남는 금액의 2/3은 내 소유로, 1/3은 아이의 소유로 한다. 너의 소유로 되어있는 자동차는 가져가서 알아서 처분하기 바란다. 나에게 명의양도를 원하면 중고차 시세에 맞춰 현금청산 가능하다. 각종 보험 수익자 명의도 쌍방 해지하거나 변경하도록 한다. 인터넷, IPTV, 정수기 등 정기 서비스 또한 모두 해지하거나 현금청산으로 명의양도할 수 있다. 사용하던 가전 및 가구류도 원한다면 모두 가져갈 수 있다.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너의 모든 흔적이 지워지길 바란다. 이혼의 형식은 최대한 간결하게 합의를 통한 것으로 하길 원한다. 태호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아이라면 양육비는 지급할 이유가 없다. 친부를 찾아 친생자관계존재확인소를 통해 아이의 호적을 빨리 옮겨가고 양육비는 그에게 지급을 청구하기 바란다. 만약 아이가 바뀌었다면 친부모와 협의해 태호를 친부모에게 돌려보내고 우리 사이의 친자를 데려올 것인지 그대로 양쪽 집에서 각자 키울 것인지 등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그건 우리의 이혼 사유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문제이니 별도로 풀어나가도록 하자. 20여년 전 누구보다 자식들의 행복한 앞날을 기뻐하며 응원해주셨던 양쪽 집안 부모님들에게 큰 슬픔과 충격이겠지만 각자 숨김 없이 설명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너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거다. “내가 벌어온 돈으로 당신도 먹고 살지 않았냐, 나도 재산형성 과정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너의 수입은 모두 너의 취미생활과 쇼핑과 아이 앞으로 다 들어갔으니 너무 억울해 할 것 없다. 또 너의 명의로 대출받아 써온 생활자금이나 내 사업자금 충당, 목동 집 건축자금, 또는 작업장 및 매장 설비류에 지원했던 것 또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니가 받은 대출은 앞서 말한 망원동 집 매각 잔금에서 너의 개인 채무를 변제하기로 하면서 충분히 해소될 것으로 생각한다. 원할한 합의 이혼을 원한다고 한 것은 아이의 친부로 속아온 세월에 대한 위자료 따위 청구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금액적으로 환산해보아도 너에게 손해보다는 이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전 한 닢조차 남겨줄 이유는 없지만 망원동 집 매각 잔금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금액의 1/3을 아이의 소유로 한다는 것은 아무런 죄 없이 하루아침에 많은 것을 잃게 된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고 한 때 내 삶의 이유이자 가장 큰 기쁨이었던 어린 친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이혼을 먼저 제안하면서 기대했던 금전적 이익에 많이 못미치겠지만 잘 관리해 오롯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는 데 써주길 당부한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니가 얘기했던 것처럼 태호가 자라 아빠 엄마를 이해해줄 날은 오기 어려울 것이며, 우리가 시간이 지나 친구같은 사이로 서로를 응원해줄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가 될 여지 또한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원하는 이혼의 조건이다.
위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니가 계획했던 이혼의 방향이나 목적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너는 입법부라는 좋은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알게 된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는 법조인도 꽤 될 것이다. 직접 그들을 통하거나 혹은 승소율이 꽤 높다는 변호사를 소개받아 소송이라는 길고 어려운 길을 택할 수도 있을 거다. 헛된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의 수렁텅이에 빠지지 말기를 경고한다. 소송이라는 건 비용과 시간, 인내심과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더라. 패소하면 상대방 승소자의 소송비용까지 부담하게 되는 건 변호사들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거다. 우리가 법정에서 마주보고 서게 되면 분명 민사소송에서 끝나지 않게 될 거야. 배우자 기망 사기는 형사소송의 사유로 충분하고 너는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고 곧 너의 삶과 주변의 많은 것이 폐허가 되겠지. 한 때 사랑했었고 남편이었고 니 아이의 사랑하는 아빠였던 사람의 마지막 조언이다. 새겨들어주길 바란다.
다 써놓고 보니 부끄러운 것이 너무 많다.
너무 쉽게 결정했고 너무 쉽게 포기했고 너무 쉽게 믿으며 살았다. 현실은 때로 소설보다 드라마보다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적어도 내가 그동안 살았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겠지. 살아가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모든 것을 결정할 때 신중할 것이고 어떤 것도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 누구도, 어떤 것도 의심하며 살겠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입니다.
아내의 외도, 불성실한 생활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혼은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할 수 있으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재판을 통해 할 수도 있습니다. 재판을 통해 이혼하려면 그 이혼원인이 「민법」에서 정한 재판상 이혼의 사유에 해당되어야 합니다.
민법 제840조(재판상 이혼원인) 부부의 일방은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1.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2.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3.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4. 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5.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6.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작성하신 내용은 제1호, 제6호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혼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종국적인 판단은 법원에서 내려지는 것이므로 당사자께서는 소송에서 증거를 통하여 주장 및 입증하셔야 합니다.
부부가 이혼하면 혼인 중 부부가 공동으로 모은 재산을 나눌 필요가 생깁니다. 이 때 이혼한 부부 일방이 상대 배우자에 대해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재산분할청구권입니다. 재산분할청구권은 협의이혼, 재판상 이혼의 경우에 모두 인정되며, 부부 사이에 재산분할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정법원에 재산분할심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839조의2, 제843조 및 「가사소송법」 제2조제1항제2호나목 4), 제36조제1항].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재산은 원칙적으로 혼인 중 부부가 공동으로 협력해서 모은 재산으로서 부부 중 누구의 소유인지가 불분명한 공동재산입니다. 판례는 그 재산이 비록 부부 일방의 명의로 되어 있거나 제3자 명의로 명의신탁되어 있더라도 실제로 부부의 협력으로 획득한 재산이라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대법원 1998. 4. 10. 선고 96므1434 판결).
※ 부부의 협력이란 맞벌이는 물론이고, 육아 및 가사노동도 포함되는 것으로 판례는 보고 있습니다(대법원 1993. 5. 11. 자 93스6 결정).
혼인파탄에 대한 책임이 없는 사람은 책임 있는 사람에게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위자료를 청구해 볼 수 있습니다. 위자료의 액수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는 일원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판례(대법원 2004. 7. 9. 선고 2003므2251,2268 판결, 대법원 1987. 10. 28. 선고 87므55,56 판결등)에 따르면, ①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정도, ② 혼인관계파탄의 원인과 책임, ③ 당사자의 재산상태 및 생활정도, ④ 당사자의 연령, 직업 등 변론에 나타나는 모든 사정을 고려해서 위자료의 액수를 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무상 위자료는 3천만원 이내로 인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편, 갑작스레 알게 된 여러 사실들로 인해 무척 혼란스러우실 것으로 보입니다.
혼인 기간 중 아내가 출산하였고, 자녀가 친생 추정을 받고 있으나 내 친자가 아닐 때에는 친생부인의 소를 통해 친자관계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친생부인의 소는 사유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제기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많으시겠지만 모쪼록 좋은 결과 있기 바랍니다.
